1. 망쳐버린 전쟁 무용담

1. 망쳐버린 전쟁 무용담

 

테오 콕스호른(Mr. Theo Kokshoorn, 1927년 1월 16일 생)씨의 젊으셨을 때의 사진을 보면 훤칠한 키에 미남이었다. 1995년 당시 68세. 한국 교우들 앞에 제복을 입고 서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콕스호른씨는 어깨가 약간 구부정하였고 백발이었고 손은 약간씩 떨고 있었다. 연세가 든 노인네를 모두 기대에 찬 눈초리로 바라 보았다. 1995년 7월 2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한인교회에서는 ‘6.25 상기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말로만 듣던 한국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네덜란드 참전용사로부터 직접 들을 것이다. 이런 기회가 또 있으랴! 네덜란드 참전용사로부터 직접 한국의 전쟁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흥미진진한 무용담이 펼쳐질 것이다. 어쩌면 용감무쌍했던 참전용사의 무용담은 6.25가 도대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고 나라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이 평화를 위해 얼마나 귀한 목숨들이 피 흘렸는지를 증언해 줄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애국심을 불러 일으켜줄 것이다. 

그러나 참전용사 테오 콕스호른씨는 한국 교인들의 이런 큰 기대를 일순간에 무너뜨렸다. 연단에 선 콕스호른씨는 한국 교인들이 기대한 생생한 전쟁 무용담은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연신 눈물만 흘리고 코만 풀었다. 말씀 한 마디 못하였다. 그 날 통역을 맡은 집사는 어른께 드릴 물컵만 들고 서 있었다. 기대 넘쳤던 회고담은 엉망이 되었다. 앞에서 훌쩍이는 노인을 긴 시간 바라 보기란 여간 민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함께 울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기대는 무너졌다.

참전용사께 대한 경례!

왜 이렇게 됐을까? 원인을 모른다. 거수경례 때문이었을까? 최정숙 집사가 건넸던 꽃 다발 때문이었을까? 한 주 전주부터 교우들은 거수경례를 연습했다. 군에 다녀온 김충길 집사가 큰 소리, “열중~쉬엇! 차렷! 경롓!” 구령을 외치면 그에 맞추어 모든 교우들은 “필승!”을 외치며 거수경례를 하는 것이었다. 초청 연사가 6.25한국전 참전용사인 만큼 군인들처럼 멋지게 거수경례로 인사 한 번 거나하게 올려드리자는 심산이었다. 처음엔 주저하던 여성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함께 참여하였다. 여성 교우들의 거수경례는 정말 애교스러웠다. 

교우들은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감사한 마음 말이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한국 전쟁 당시 그들이 멀고 먼 동양의 한반도까지 와서 생명 걸고 피 흘리며 싸워줄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그들이 유엔군으로 와서 돕지 않았더라면, 국군의 힘만으론 북한 공산군의 침공을 막아낼 수 없었고 결국 공산화 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의 북한 동포들을 보라. 얼마나 참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래서 대한민국을 위해 싸워 주었던 모든 유엔군들에게, 그리고 그 유엔군을 대표해서 이 어른께 고마운 마음을 담아 전하려 했던 것이다.

좀 지나쳤나? “일동 기립!” 김충길 집사의 호령과 함께 모두 일어섰다. 어른은 예기치 않은 장면에 몹시 당황했고 동시에 크게 흥분되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엉거주춤 일어섰다. 군악대 출신 김 집사가 구령을 하였다. “참전용사님께 대하여 경례!” 모두 “필승!” 소리치며 동시에 거수 경례를 올리자, 어리둥절하시던 어른은 몹시 당황하면서도 몸에 배신 습관대로 군인답게 정 자세로 경례를 받았다. 

최정숙 집사의 꽃다발을 받는 콕스호른씨

그런데 최 집사가 꽃다발을 전해 드리고 박수로 환영하자 그때부터 어른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감정이 격앙되셨다. 이런 감사 표시를 예상치 못하셨던 것이다. 아무튼 작은 꽃다발이 그의 눈물보를 터트린 것 같았다. 

그 이후의 사태, 이 경우 사태란 말이 적절하다,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거수경례에 감격하신 어른께서는 그 큰 덩치를 가누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어린아이처럼 훌쩍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 하고 싶은 말씀이 얼마나 많으셨을까? 들려 주고 싶으신 무용담이 얼마나 많으셨을까?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으셨을까? 몇 달 전부터 준비하셨는데…. 그러나 어른은 끝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셔서 한마디 말씀도 못하시고 그래서 6.25 전쟁 회고담은 문자 그대로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마쳐 버렸다. 

어른은 한국전쟁 당시 중사 계급으로 기관총 사수였다. 힘이 좋아 무거운 기관총을 가볍게 들고 한국의 험한 산야를 휘졌고 다녔다. 1950년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그 이듬해 1951년 2월까지 이어졌고 그 해 북한군과 중공군을 북쪽으로 밀어내기 위한 ‘일제소탕 작전(Operation Roundup)’이 개시됐으나 곧바로 적의 반격에 연합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네덜란드군은 이른바 ‘대량학살 계곡’으로 불린 횡성-홍천 전선에서 미군과 적의 공세를 온몸으로 막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중공군들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은 끔찍스러웠다. 언덕배기에 기관총을 걸쳐 놓고 사방에서 올라오는 중공군들을 향해 무수한 사격을 퍼 부었지만, 쏴도 쏴도 끝없이 올라오는 중공군들, 사방에서 들려 오는 꽹과리소리, 나팔소리, 피리소리, 곁에서 실탄을 챙겨주는 조수와 함께 기관총이 검붉게 달아 오르도록 사격을 했으나 중공군들의 공격은 그치질 않았고 열을 심하게 받은 기관총을 식히던 수통의 물조차 바닥이 나 버렸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었다. 코 앞에 이른 죽음의 공포 속에 큰 충격을 받으셨다. 그 이후로 어른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때고 그 순간이 떠오르면 가슴이 뛰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이상 행동이 나타났다. 평생을 병원에 다녀야 했고 약을 들어야 했다.

그 날 ‘비목’ 합창과 ‘주먹밥 먹기’ 행사가 없었다면 교우들은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6.25 당시 화천전투에 참전했던 한명희씨가 작사를, 장일남씨가 작곡을 한 ‘비목’이란 노래가 행사를 살려 주었다. 비목이란 나무로 만든 비석을 뜻한다. 전장에서 쓰러져 죽은 전우를 땅에 묻고 비석 대신 나무로 십자를 만들어 꽂아 놓은 것을 말한다. “포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녁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한명희씨는 전장의 격전지 어느 능선에서 개머리 판은 거의 썩어가고 총열만 남은 카빈 총 한 자루를 주워와 깨끗이 손질해서 옆에 두곤 그 주인공에 대하여 한 없이 생각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2절은 더욱 애절하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먼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놀이 되어 쌓였네.”

그 옛날 6.25 전쟁 당시 국군들은 주먹밥을 먹으며 전장을 달렸단다. 노래를 부르면서 전쟁용사들을 생각하며 주먹밥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서둘러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 부르며 행사를 어물어물 마쳤다. 행사는 실패했다.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에 있는 횡성감리교회는 그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 성탄절 시즌에 옛 교회 안에서 풍금을 치며 성탄 캐롤을 부르던 네덜란드 병사들 중 여러 명이 국군으로 위장하여 잠입한 북한군들의 기습에 죽어 나갔다. 현재의 횡성감리교회에는 그 기념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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