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월~1978년 3월, 구계교회 전도사

구계감리교회! 모두 마곡사는 알아도 구계교회는 모른다. 마곡사 근처의 구계교회다. 지도를 놓고 보면 천안에서 공주로 내러가는 큰 길과 청양을 거치고 부여로 내려가는 두 길들이 커다란 산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올 보게 된다. 그 한 가운데 마곡사가 있고 그 근처에 구계교회가 있다. 충남에서 보기 드문 산골 중에 산골이다. 

(동네 청년들 따라 경운기를 타고 마곡사를 다녀옴)

신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1976년 1월에 부임해서 군목 가기 전 1978년 3월까지 구계교회에서 봉직했다. 교인들도 10여명이 채 되질 못했고, 담임자 사례비는 월 1만 5천원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재정이 부족해서 전임자는 그 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전임자는 교회를 떠나면서 후임자 사례비를 월 2만원으로 대폭 올려 놓았다. 후임자를 위해 적극 배려한 고마운 조치였다.
 
부임하는 날 재정을 맡고 있는 최OO권사님이 내게 묻는다: “전도사님, 전임 전도사님 통해 들으셨지요? 저희 재정 형편을…. 전임 전도사님께서 억지로 월 사례비 2만원으로 정해 놓으셨지만…. 전도사님 아시다시피 저희는 사례비를 그렇게 못 드려요. 어쩌죠?” 나는 이렇게 답변했다: “권사님, 전도사 사례비를 염려해 주시는 것 고맙습니다. 그러나 크게 염려하지 마세요. 저는 주의 종입니다. 권사님이 교회 재정 보시면서 염려 많이 되시겠지만…. 그럴수록 기도해 주세요. 교회는 주님께서 주인이 되시고 주의 종도 주께서 당신의 종이니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크게 염려하지 마시고 기도합시다.”
 
큰 소리는 쳤지만, 내가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서 그렇게 답변한 것이 아니었다. 대답은 잘 했지만…. 주의 종의 말이, 그것도 교회에 부임하고 했던 첫 마디가, 땅에 떨어질까봐 나는 그것이 몹시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막막했다. 어떤 뾰족한 수도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이 시골 구석 교회가 갑자기 부흥할 전망이나 기색도 물론 전혀 없었다. 주변머리도 없어 큰 교회에 도움 요청도 할 줄 몰랐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수가 없지…. 기도 밖에는….
 
이것은 기적이었다. 내 말이 아니다. 재정 권사의 말이고, 교인들의 말이다. 내게도 이것은 기적이었다. 매 달 헌금 수입이 1만원이 채 안 되던 교회가 갑자기 2만 5천원 이상으로 헌금 수입이 훌쩍 뛰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교회의 재정을 채워 주셨다. 이 헌금 통계는 교회를 사임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고 끊이지 않았다.
 
사연은 이랬다. 한 달이 못 되어 연종국민학교 (지금은 폐교 연종캠프장이 됨, 참고: 구글지도)에 선생님 한 분이 발령을 받고 오셨다. 이광연 집사와 윤효진 집사 부부였다. 병욱이란 아들이 있었고 1년 후에는 둘째 병길이가 태어났다. 역사상 그 학교에 예수 믿는 선생님이 오신적이 없었다. 본인의 요청이 없고서는 교육청에서 이런 깡촌에 정규 교육대학을 졸업한 선생을 발령낼 리 없었다. 선생님이 자청해서 오신 것이다. 선생님은 그 먼 연종리에서 교회까지 1시간 반 이상 걸려 아기를 없고 부인과 함께 걸어서 나오셨다. 극성맞은 신자가 아니고서는 쉽게 나올 수 없는 거리였다.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기적이다. 이 선생님 부부는 독실한 신자였고 더구나 뜨겁기로 소문난 여의도 순복음교회 집사님들이었다. 이들이 내는 십일조만해도 전도사의 사례비는 넉넉히 채우고도 남았다.
 
집사님 부부는 볼품없는 이 목사를 만나서 오랫동안 진실한 목회자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며 크게 기뻐하였고 떠날 때까지 정성과 충성을 다했다. 당시 나는 입이 헐어 입병을 달고 살았다. 먹지도 못하고 말을 못했다. 설교를 못할 지경이 되면 이 집사에게 종종 설교를 부탁했고, 그렇게 고생하는 나를 위해 부인 윤효진 집사는 그 멀리서 불고기를 양념에 재워 가져오곤 하였다. 나는 그 맛있는 불고기 맛에 아픔을 참고 눈물을 삼키며 간신히 먹어 입을 지진 후 입을 열어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이었다.

(1976년 어버이 주일 야외 예배 기념, 맨 왼쪽 윤효진 집사, 맨 오른쪽 이광연 집사, 나와 이 집사 사이에 장양 모친)

오래 전, 고등학교 시절 고 김형태 목사님 (전 대전성산수도원원장)의 부흥회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다: 

“들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멀리 집에서 울타리 사이로 주인이 내다볼 때, 열심히 일만하는 일꾼과 주인집 굴뚝만 자꾸 쳐다보며 ‘굴뚝에 연기가 언제 나나, 언제 점심 주려나….’ 궁시렁거리며 일에는 관심 없고  새참 먹는데만 관심 있는 일꾼이 있다면 어느 일꾼을 쓰겠느냐? 일꾼이 열심이 일만 하면, 점심은 주인이 알아서 내 오는 것”이라 설교하셨다. 

이 설교는 나의 전 목회 여정에 하나의 모토가 되었다. 나는 내 사명에 충실하리라. 나의 입고 먹고 사는 것은 나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쓰시는 나의 주인 하나님 책임져 주시리라. 일꾼으로 나는 내 사명에 충실하고 사례비에 관심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때문에 나는 나의 목회 여정 가운데 사례비 때문에 교우들과 실랑이를 벌인 적이 없었다. 나는 무사히 48년 목회를 마쳤지만, 그 바람에 나의 집사람은 고생을 많이 하였다. 내 탓이다. 사례비가 깎인 적도 있었고, 사례비를 아예 못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때도 나는 교인들에게 뭐라하지 않았다. 급할 때는 하나님께 나아가 이사야처럼 쪽지에 내역을 써서 기도로 요청하긴 하였다. 확실한 것은 이제까지 굶어 죽지 않았다는 것,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의 먹고 입고 사는 것을 책임져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하나님께 드린 재정보고: 추후에 자료 찾아 이곳에 올릴 예정임. 지금은 공간)

이광연 집사님은 연종국민학교에 최소한 7년은 계실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웬걸…. 내가 교회를 사임하기 바로 한 달 전에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고 말았다. 교인들 뿐만 아니라, 이광연 집사님 스스로도 이창기 전도사님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 같다고 하였다. 나 역시 그렇게 믿는다. 

(내 옆에 장근순양, 앞줄 오른쪽에 장근순 언니)

사진 속 아기를 안고 있는 이는 이광연 선생님 부인 윤호진 집사님이고 나와 이광연 선생님 사이에 서 계신 분은 세동에 사는 장근순 양의 모친이 되신다. 그 모친은 간질에 걸린 딸의 병을 고치러 교회를 나왔고 나는 열심히 기도해 주었다. 그 먼 시골 길을 1시간 반 이상 걸어서 장양과 장양의 언니 두 딸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왔다. 장양의 부친은 못되기로 소문난데다 그 부인과 두 딸들이 교회를 다닌다고 그렇게 학대하였다. 예배를 핑게로 젊은 전도사 보러 간다고 덤테기도 씌우셨다. 주일 예배만 나온 것이 아니라 주일 저녁 예배에도 수요일 저녁 예배 때에도 캄캄한 어두운 밤길을 세 모녀가 호롱불을 들고 교회를 나왔다. 그 동내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7년 여름이었다. 

1978년 3월 나는 입대하러 그 교회를 떠나야 했다. 한 달 전 이광연 선생님이 떠났고 나까지 떠나게 되자 교인들은 모두 슬픔에 잠겼다. 특별히 장양의 식구들은 상심이 너무 컸다. 울고 있는 젖먹이를 두고 떠나는 어미처럼 떠나는 나도 마음이 너무 괴롭고 아팠다. 지금껏 장양과 그 모친과 그 언니의 애저린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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