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계감리교회! 모두 마곡사는 알아도 구계교회는 모른다. 마곡사 근처의 구계교회다. 지도를 놓고 보면 천안에서 공주로 내러가는 큰 길과 청양을 거치고 부여로 내려가는 두 길들이 커다란 산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올 보게 된다. 그 한 가운데 마곡사가 있고 그 근처에 구계교회가 있다. 충남에서 보기 드문 산골 중에 산골이다.
(동네 청년들 따라 경운기를 타고 마곡사를 다녀옴)
(1976년 어버이 주일 야외 예배 기념, 맨 왼쪽 윤효진 집사, 맨 오른쪽 이광연 집사, 나와 이 집사 사이에 장양 모친)
오래 전, 고등학교 시절 고 김형태 목사님 (전 대전성산수도원원장)의 부흥회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다:
“들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멀리 집에서 울타리 사이로 주인이 내다볼 때, 열심히 일만하는 일꾼과 주인집 굴뚝만 자꾸 쳐다보며 ‘굴뚝에 연기가 언제 나나, 언제 점심 주려나….’ 궁시렁거리며 일에는 관심 없고 새참 먹는데만 관심 있는 일꾼이 있다면 어느 일꾼을 쓰겠느냐? 일꾼이 열심이 일만 하면, 점심은 주인이 알아서 내 오는 것”이라 설교하셨다.
이 설교는 나의 전 목회 여정에 하나의 모토가 되었다. 나는 내 사명에 충실하리라. 나의 입고 먹고 사는 것은 나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쓰시는 나의 주인 하나님 책임져 주시리라. 일꾼으로 나는 내 사명에 충실하고 사례비에 관심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때문에 나는 나의 목회 여정 가운데 사례비 때문에 교우들과 실랑이를 벌인 적이 없었다. 나는 무사히 48년 목회를 마쳤지만, 그 바람에 나의 집사람은 고생을 많이 하였다. 내 탓이다. 사례비가 깎인 적도 있었고, 사례비를 아예 못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때도 나는 교인들에게 뭐라하지 않았다. 급할 때는 하나님께 나아가 이사야처럼 쪽지에 내역을 써서 기도로 요청하긴 하였다. 확실한 것은 이제까지 굶어 죽지 않았다는 것,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의 먹고 입고 사는 것을 책임져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하나님께 드린 재정보고: 추후에 자료 찾아 이곳에 올릴 예정임. 지금은 공간)
이광연 집사님은 연종국민학교에 최소한 7년은 계실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웬걸…. 내가 교회를 사임하기 바로 한 달 전에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고 말았다. 교인들 뿐만 아니라, 이광연 집사님 스스로도 이창기 전도사님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 같다고 하였다. 나 역시 그렇게 믿는다.
(내 옆에 장근순양, 앞줄 오른쪽에 장근순 언니)
사진 속 아기를 안고 있는 이는 이광연 선생님 부인 윤호진 집사님이고 나와 이광연 선생님 사이에 서 계신 분은 세동에 사는 장근순 양의 모친이 되신다. 그 모친은 간질에 걸린 딸의 병을 고치러 교회를 나왔고 나는 열심히 기도해 주었다. 그 먼 시골 길을 1시간 반 이상 걸어서 장양과 장양의 언니 두 딸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왔다. 장양의 부친은 못되기로 소문난데다 그 부인과 두 딸들이 교회를 다닌다고 그렇게 학대하였다. 예배를 핑게로 젊은 전도사 보러 간다고 덤테기도 씌우셨다. 주일 예배만 나온 것이 아니라 주일 저녁 예배에도 수요일 저녁 예배 때에도 캄캄한 어두운 밤길을 세 모녀가 호롱불을 들고 교회를 나왔다. 그 동내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7년 여름이었다.
1978년 3월 나는 입대하러 그 교회를 떠나야 했다. 한 달 전 이광연 선생님이 떠났고 나까지 떠나게 되자 교인들은 모두 슬픔에 잠겼다. 특별히 장양의 식구들은 상심이 너무 컸다. 울고 있는 젖먹이를 두고 떠나는 어미처럼 떠나는 나도 마음이 너무 괴롭고 아팠다. 지금껏 장양과 그 모친과 그 언니의 애저린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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