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K방송–교회 문을 닫다

3.   K 방송교회 문을 닫다

 

원래 헤이그한인교회는 로테르담(Rotterdam)에 있었다. 그러나 2000년도를 지나면서 더 이상 로테르담에 있지 못하고 헤이그로 옮겨야 했다. 여러 원인들이 있겠으나 그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2000년 6월 25일 주일에 있었던 K 방송이었다. 

교인 30명을 데리고 6.25 상기 네덜란드 참전용사 위로회를 매 해 연다는 것은 참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콕스호른씨의 감격의 눈물도 그 효과가 잠시, 몇 년씩 가는 것은 아니었다. 힘들고 어려운 것은 현실이고 행사는 소망이었다. 교인들은 힘겨워했고 교회 안에서 교인들 사이에 삐걱거리는 소리도 조금씩 들렸다. 1995년부터 시작된 행사를 2000년까지 끌고 온 것만 해도 대견스런 것이었다.

(1996년 5월 25일, 로테르담 불락시장 터에서 북한동포돕기 바자회)

2000년도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행사가 많은 해였다. 세기를 넘긴다며 전 세계적으로도 요란을 떨던 때였다. 게다가 바로 2000년은 6.25가 발생한지 50주년이 되는 해가 아닌가? 그래서 로테르담 시나, 한국의 관련된 기관들이나, 그리고 참전용사 위로회를 개최하는 로테르담 한인교회나 모두에게 그 해는 정말 중요한 해가 되었다. 로테르담 시에서도 큰 행사를 준비했고 한국 정부에서도 북한 결핵 어린이 돕기 유럽 자전거 행진대회라는 큰 행사를 열었고 K 방송국에서도 취재차 그들을 따라 나왔다. 로테르담 한인교회에서도 나름대로 한국전쟁 5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한인 교회는 매 해 행사를 벌여 왔기에 행사 노하우가 쌓여 있었다. 자연히 로테르담 시나 한국의 기관이나 K 방송국이나 모두 로테르담 한인교회에게 도와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기꺼이 모두에게 모든 도움을 주려 하였다. 그리고 행사를 개방하여 누구든지 적극 참여토록 하였다. 

6월 24일, 행사 바로 전 날 토요일 오후 3시 15분, 네덜란드 참전용사회 주재로 로테르담 시내의 공원 크루스베잌(Crooswijk)에 있는 공동 묘지에서 6.25 참전 전몰 장병 기념탑 제막식이 열렸다. 로테르담(Rotterdam) 시 출신 네덜란드 젊은이 8명이 한국 전쟁에 죽었다. 참전 50주년을 맞아 로테르담 시에서 그 중 4명의 젊은이들을 위해 기념탑을 세우는 행사였다.

(1997년 9월 13일, 북한동포 돕기 바자회, 참전용사 콕스호른씨와 동료들)

참전용사회가 주관했다. 로테르담 시장과 대한민국 대사가 참석하여 축사를 했고 이 목사는 기도를 하였다. 이 목사만 참석한 것이 아니다. 그 다음 날 행사 준비가 산더미 같은 교우들까지 참석시켰다. 게다가 한복을 입고 나오게 했다. 얼마나 예쁜가? 한복이.. 그날 모든 사람들의 이목과 카메라의 촛점은 당연히 한인 교우들에게 모아졌지만 그러는 사이 그 다음 날 행사 준비거리와 교우들의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다.

 ‘북한 결핵 어린이 돕기 유럽 자전거 행진대회에 참여한 이들은 70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해서 독일 베를린까지 2천 킬로미터를 자전거로 여행한다고 했다. 그들은 자전거 여행을 통한 모금활동으로 북한의 결핵 어린이들의 치료를 돕는다 했다. 그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피곤한 중에도 그 다음 날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다. 비록 그들은 일정 때문에 참전용사위로회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많은 격려와 응원을 해 주고 떠났으며 우리민족 서로돕기 운동본부에서는 500길더의 헌금을 보내 격려해 주었다.

문제는 K 방송국 취재팀이었다. 그들은 깡패에 버금갔다. 그들 눈에는 지나 온 로테르담 한인교회의 행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로테르담 한인교회를 취재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참전용사들을 취재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행사나 참전용사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 전하기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흥미와 재미, 유명 탤런트 한 사람을 조명하기에만 바빴다.  

취재라 했던가? 그런 것이 취재인가? 부엌에서 바쁘게 음식을 만들고 있는 교우들을 모두 내 보내고 유명 탤런트 한 사람을 들여 보내 교우들이 다 만들어 놓은 음식을 앞에 놓고 만드는 척 시늉하면서 그녀만을 찍어 한국 방송에 내보내는 것이 취재인가? 그들이 보기에 그것이 취재였을지 몰라도 교우들 눈에는 파렴치한 행위였다. 수고의 땀은 교우들이 흘리고 행사에 협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면서 교우들의 수고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 없었던 것이 취재인가?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ㅇㅇ이 번다 했다. 교우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교우들이나 참전용사들이나 행사는 뒷전이었다. 그들 안중에는 그들이 데리고 온 유명 탤런트와 한국의 시청자들뿐이었다.  

(로테르담한인교회 시절 여선교회회원들, 참전용사 위로회의 공로자들)

참전용사 위로회를 간신히 마치고 방송 관계자들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떠나자 교우들이 내게 곧 바로 몰려와 항의 하였다. 이전 행사에서는 기쁨과 보람이 있었지만 이번 행사에서는 불평과 비평만이 쏟아졌다. 위기를 만났다. 다른 사람들 볼 것 없습니다.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알아 주시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 목사는 진심으로 말했지만 교우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담임목사가 방송국이나 대사관에 항의 한 번 해 주지 않은 것, 담임목사의 고지식한 면, 모든 것이 교우들의 실망감을 키워 주었다. 아쉽게도 몇몇 분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그 여파로 2000년 12월 마지막 주일 예배와 함께 로테르담 한인교회는 해산 예배를 드리고 문을 닫게 되었다. 

이 목사는 참전용사들을 등록교인이나 되는 것처럼 가정 방문도 했고 병원도 찾아 갔고, 장례식에도 찾아 갔다.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 기도 해 주었다. 한인 목회뿐만 아니라 참전용사 목회도 한 셈이다. 

장례식에서 운구를 보낼 때마다 정중히 거수로 경례 했다. 가족들과 친지들, 또한 동료들이 구경했다.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지켜 주었던 용사들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이 목사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을 대표했다. 눈물이 흐를 때도 있었다. 이 목사는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을 흘렸다.  

참전용사 목회가 보람이 있고 누가 알아주고 협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목회에 도움되었던 것도 아니다. 교인들이 힘들어 하고 시험들 때도 있었고 이웃 교회로 떠나는 교인들도 있었다. 경제적으로나 목회적으로 도움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 때문에 열심히 했다. 어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교회는 헤이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지내 놓고 보니 이 모든 어려움들도 하나님께서 몰아가셨던 섭리였음을 깨닫게 된다. 이준기념교회를 세우시도록 이끄셨던 손길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으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셨다. 

로테르담에서 헤이그로 교회를 옮기느냐 마느냐 실랑이를 벌일 때 일이다. 살벌한 표정으로 세 분 집사들이 이 목사를 불러 냈다. 빌려서 예배 드렸던 스콧치교회 1층 구석 아주 좁은 창고 안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얘기였다: 왜 저희 교회가 이곳을 떠나 헤이그로 이사를 가야 하는지 그 이유만 말씀해 주세요. 이유가 분명하지 않으면 저희는 목사님과 함께 헤이그로 가지 않을 거예요. 단호했다. 2000년도 말이었다.

그 때 이 목사가 왜 교회가 헤이그로 이사를 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미리 알았더라면 이 목사는 멋진 답변과 함께 리더십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고 이 목사는 바보가 되어 분명한 대답도 못한 채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7년 후 헤이그에 이준기념교회가 세워진 다음에서야 이 목사는 왜 교회가 그 때 헤이그로 이사를 가야 했었는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구나! 맞아, 헤이그에 이준기념교회를 세우기 위해 교회를 옮기셨어! 진작 좀 알았더라면 그 때 멋진 대답을 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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