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땜질’위로회
1995년부터 시작된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용사 위로회는 50주년이 되던 2000년도 행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 날은 마침 50년 전 전쟁이 터졌던 6월 25일과 같이 동일하게 주일이었고 이 목사도 역시 그 날 또 다른 전쟁을 치렀다.
이전에 스스로 행사를 조직하고 참여했을 때에는 기쁨과 자원함으로 참여하였던 교우들이 2000년도에 치렀던 50주년 행사 때에는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 K 방송이나 대사관, 한인회, 다른 교회 교인들 등 외부 기관들과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50주년 행사에 이모 저모로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간섭도 하고 방해도 했다. 그러자 교우들이 그들에 대한 쌓였던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이 모든 일들을 수습하고자 소집한 회의에서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된 한 젊은 교우가 행사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는 사실 온지 얼마 안 돼서 지난 날 참전 용사 위로회가 얼마나 보람된 행사였는지를 잘 모르고 오자마자 겪었던 파동만 보고 이렇게 말했다: “왜 로테르담 한인교회가 참전용사 위로회를 해야 합니까? 30여명에 불과한 교회 인원과 재정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데 왜 굳이 로테르담 한인교회가 맡아 이렇게 온 교우들이 ‘무의미’한 고생을 해야 합니까? ‘참전용사 위로회’와 같은 행사에 관심도 많고 재원도 넉넉한 대사관이나 한인회나 또는 더 큰 다른 교회들에게 맡깁시다. ‘그까짓’ 참전용사들을 위한 행사 때문에 ‘주님의 어린 양’들인 교우들이 피해를 봐서야 되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의견만 밝히곤 훌쩍 이웃 교회로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은 오랫동안 교우들의 뇌리 속에 남아 있어 남은 이들로 하여금 이 행사의 이유나 목적 등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였다. 그의 말이 맞지 않은가? ‘그까짓’ 참전용사들 행사 보다는 교회가 우선이고 교우들의 ‘무의미’한 고생 보다는 복음 전파가 우선이지 않은가……’
이 목사는 그 청년을 잘 설득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그의 의견을 존중했다. 2000년 12월 15일 저녁 6시경, Schiphol 호텔에서 화란 한인회 주최로 열리던 망년회가 있었다. 대사관, 한인회, 그리고 네덜란드 안에 있는 여러 한인교회 목사들, 신부, 각 교회 장로들과 평신도 대표들에게 전화해서 화란 한인회의 망년회 때 따로 모여 참전용사 위로회를 로테르담 한인교회에서 더 이상 못하겠으니 다른 방안을 모색해 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영사, 그리고 세 분의 장로들만 모여 가벼운 덕담만 나누고 돌아갔다. 참전용사 위로회? 모두 관심은 있지만 앞장서서 봉사하겠다는 기관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성탄절 시즌에 악기를 연주하는 교우와 함께 참전용사 프린스(H. W. Prins)씨를 위로 차 방문하게 되었다. 휠체어를 타셨고 몸이 불편하여 항상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부인은 일찍 세상을 뜨셨고 옆에 서 계신 할머니 한 분을 가리키며 태연스럽게 ‘걸 프렌드’라고 소개하였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혼란스러웠다. 한국에선 ‘걸 프렌드’니 ‘보이 프렌드’니 하는 말은 젊은이들만의 전문 용어가 아닌가? 바로 이웃에 살고 계신 할머니 한 분이 그의 여자 친구가 되어 그를 돌보고 있었다. 프린스씨는 부인이 먼저 돌아 갔고 할머니는 남편이 먼저 돌아갔단다. 그래서 지금은 혼자가 된 노인들끼리 서로 친구가 되어 돕고 계셨다. 그리고 두 분이 아주 자연스럽고 다정스럽게 서로 안아 주면서 ‘보이 프렌드’, ‘걸 프렌드’라고 부르고 계셨다. 노인들의 노골적인 애정 표현에 얼굴이 뜨거웠지만 보기 싫지 않았다.
(다방구 놀이를 함께 뛰었던 교우들)
프린스씨 방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벽에 걸린 대형 한복 치마 저고리 한 벌이었다. 그는 두터운 신문 스크랩을 들고 오셨다. 그 안에는 전후 네덜란드 신문에 난 모든 한국과 북한 기사 내용들이 차곡차곡 스크랩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서랍 속에 쌓여 있던 것은 해방 이후에 나온 모든 한국의 아리랑 곡들의 카세트 테이프 더미였다. 아리랑을 그렇게 좋아하시나 보다….? 아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아리랑이 아니라 바로 한국이었다. 그의 몸 속에는 아직도 꺼내지 못한 한국 전쟁 때에 박힌 5개의 파편들이 묻혀 있었다. 그렇게 피 흘려 지켜 준 나라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 후 그는 몸 불편해서 교회까지는 못 오고 헌금만 100길더를 보내 오셨다. 한국을 위해 피 흘렸던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그래서 무조건 한국 팬들이 되어 있었다. 프린스씨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참전용사들이 그랬다. 그래도 그들이 ‘그까짓’ 참전용사들인가?
2001년부터 한인 교우들은 정든 로테르담을 떠나 헤이그 근교의 마리아후베 초등학교 체육관에서 예배를 드리며 새 교회를 시작하였고 그래서 참전용사 위로회는 몇 년 동안 열고 싶어도 열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마리아후베 체육관만 해도 그렇다. 예배 장소로나 참전용사들을 모시기에는 장소가 적당치 않았다. 바로 옆 축구장에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 체육관에 배어 있던 특유의 땀 냄새, 화장실에서 바람 타고 풍겨 오는 상큼한(?) 냄새, 등받이 없는 긴 나무 의자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삐거덕 소리 등 참전용사들을 모시고 위로회를 열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예배 드리기에도 썩 좋진 않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체육관 안에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운동 기구들, 농구대며, 탁구대며, 등산 훈련용 밧줄들이며, 각종 장비들이 운동 좋아하는 많은 젊은 교우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와 호기심을 자극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해의 교회 목표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전 교우 성가대 만들기였고, 다른 하나는 전 교우 농구선수 만들기였다.
밖의 마당은 꽤 넓어 ‘다방구’를 즐길 수 있었다. 다방구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노는 놀이로서 술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채야 한다. 그러면 채임을 당한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전봇대에 손을 대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또 채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만약 살아 있는 사람이 전봇대에 붙어 있는 사람을 채면서 “다방구!” 소리를 치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함께 도망을 친다. 다방구 놀이를 하려면 술래를 피해서 열심히 도망을 다녀야 한다.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술래에게 잡혀 죽고 만다.
다방구 놀이에는 희생 정신이 들어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동료를 살려 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 자칫하면 자신도 죽을 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야 한다. 다방구 놀이에는 해방의 기쁨이 있다. 죽었으나 동료의 도움으로 다시 되 살아 난다. 죽었던 동료를 살려 내는 그 기쁨을…… 부활의 기쁨, 해방의 기쁨을 맛 보게 된다.
그 해 4월 1일은 창립 12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일로 해방의 기쁨, 부활의 기쁨을 맛보며 다방구 놀이를 했다. 교회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온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 그 넓은 체육관 뒷 마당을 땀이 나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달렸다. 뛸 줄을 몰라 술래에게 매번 채여서 늘 죽어 전봇대만 붙들고 있는 사모와 구정선씨, 김지연씨, 날쌔게 달려서 죽은 사람들을 용케도 잘 살려내는 팔팔한 미래 일꾼들 정형준군, 박종철씨, 서용일씨, 등등….. 노인네나 된 것처럼 다리를 주무르며 나이를 탓하고 앉아있는 박재형양….. 재미 있었다. 모두들 몸살이 나도록 뛰었다. 교회는 다시 부활하고 있었다.
6월이 다가오자 매 해 참전용사 위로회에 참석하셨던 참전용사들 몇 분이 안부와 함께 행사 여부에 대해 물어 오셨다. 참전용사 위로회가 생각나는가 보다. 2001년 6월 첫 주는 마침 성령 강림주일이었고 그 날 참전용사 몇 분이 찾아와 누추한 체육관에서 함께 예배 드리셨다. 로테르담에 사시는 그룬네데이크(Mr. W. Groenendijk)씨는 심한 기침 때문에 예배에 방해될까 두려워 못 오시고 대신 헌금을 보내셨다. 그러나 2003년 4월 20일 부활 주일에 몸도 많이 불편하신데 기어이 먼 길을 서너 번 대중 교통을 갈아 타고 주일 아침 일찍 출발해 늦지 않게 교회에 나오셨고 그의 바짝 마르고 푸른 혈관이 선명한 그의 손등을 본 것을 마지막으로 2006년 11월 26일에 향년 81세의 나이로 주님 품으로 영원히 떠나셨다.
2003년 부활주일엔 7분의 참전용사들이 오셨다. 교회에서는 김치를 준비하여 나눠 드렸다. 인도네시아 혈통의 참전용사 얀슨(Mr. Janson)씨는 100길더의 헌금을 하셨다. 2001년도에도 오셨던 맘마게(Mr. P. Mamaghe)씨는 상당히 먼 거리의 Boskoop이란 동네에서 2002년도에도, 2003년에도 오셨다. 김치가 모자라 행사 후에 김치를 만들어 갖다 드렸다. 2003년도에는 Roeleofarendsveen이란 동네에 사시는 달렌(Mr. A. J. v. Dalen)씨도 참석하셨다.
옛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에 근무하고 있었던 달렌씨는 근무를 마치고 네덜란드 고향에 돌아와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부친은 2년 전 죽었고 모친 홀로 있었다. 결혼하고 두 살 된 아들도 있었다. 달렌씨는 한국전 참전을 위해 고향 집에 돌아와 머문 기간이 고작 두 주간뿐, 그가 한국전 참전을 위해 승선하는 바로 그 다음 날이 21세가 되는 생일이었다. 당시 법에 따르면 21세 이하 병사가 참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그의 어머니는 좀처럼 아들의 참전 지원서에 서명하려 하지 않았다. 아들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며칠 후 21세가 된 다음에 자신이 서명하고 다음 배를 타고라도 참전하겠다고 하자 어차피 떠날 아들이라면 기꺼이 보내자고 서명하고 말았다 (인터뷰 중 그의 이야기를 함께 듣던 그의 아들이 자신이 겨우 두 살 되었을 때 울며 보채는 아들을 집에 두고 아버지가 한국을 향해 떠났노라며 원망조로 말하자 아버지는 조용히 함께 늙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달렌씨에게 들었던 한국전쟁 당시 재미난 에피소드다. 네덜란드 군인들이 전방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어느 집 부엌에 묻은 막걸리 술 항아리를 하나 발견하였다. 그러나 막걸리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들은 저녁 내내 맥주를 마시고 막걸리 술 항아리에 소변을 보았다. 그 다음 날, 미군들이 들어왔고 미군들은 벌써부터 한국 농가의 막걸리의 술 맛을 알고 있어서 부엌으로 들어가자마자 막걸리 항아리를 찾아 네덜란드 군인들이 소변 본 막걸리를 아주 맛있게 퍼 마셨다. 말릴 겨를도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 이제야 말하면 또 무슨 소용 있으랴? 더구나 미군들은 아주 흥겹게 마시고 있는데…. 네덜란드 군인들은 무슨 약속이나 한 듯,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얼굴만 쳐다 보며 빙긋 웃었다고 한다.
그의 동료들은 그의 이름과 성을 가지고 놀렸다. Van과 Dalen을 묶으면 Vandalen이 되는데 이것은 Vandalism, 즉 공공시설물 파괴행위가 된다. 그래서 달렌씨는 동료들에게 반달리즘, 즉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자’라고 놀림을 받았다.
2003년 부활 주일에 참석 못하신 분들 중엔 Soest에 사시는 Bert Peeren 씨가 있는데 편지를 보내왔다. 노인이 되어 몸 불편해 못 참석하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한국어와 영어, 또 네덜란드어를 발음 되는 대로 어린 아이 글씨체로 적어 다음과 같이 보내 오셨다: “Dear Mr. Lee, Taedani choesonghamnida, I cannot coming on 20 April. I am sickly and cannot mor good walking. My(and yuor Friend) mr. van Soeren sime like my, we are now Old mans. Nol long I have time to live. I hope you can understood my position. Thank for your letter. Gott bles You and the Korean People. Bert Peeren.”(sic.)
매 해 교회에 오시는 참전용사들은 헤이그 시청 옆에서 한국 음식점 김치 하우스를 운영하고 계셨던 신정숙 집사가 모시고 가서 저녁으로 한국 음식 불고기로 잘 대접해 주었다. 교회에서 참전용사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갖지 못하는 대신 용사들을 김치 하우스로 모시고 가 불고기를 대접해 드렸다. 신 집사는 비용을 받지 않았고 무료로 봉사하였다. 덕분에 3년 동안 정식 위로회는 못 해 드렸지만 이렇게 ‘땜질’로라도 위로회를 열어 참전용사 위로회는 중단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사는 ‘땜질’ 위로회로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러던 중 임동임 교우의 부친이자 삼성 네덜란드 법인장 되시는 임수택 지사장이 성탄절 시즌에 삼성 빌딩의 식당을 사용해도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해 주었다. 2003년 12월 24일, 수요일 밤 헤이그 한인교회
교우들은 삼성건물 식당에서 참전용사들을 모시고 풍성하고 훈훈한 위로회를 가졌다. 그날 밤 성탄절 이브 행사는 12시가 넘도록 이어졌고 100여명 이상 참석하여 대 성황을 이루었다. 이 목사는 임수택 본부장께 감사 드렸다.
누가 ‘그까짓’ 네덜란드 참전용사들이라 했는가? 그들은 한국 교인들에게 대접만 받았던 것이 아니다. 결정적일 때 한국 교회를 도와 주었다. 한국 교회가 예배 드렸던 초등학교 체육관은 7월 1일 방학과 함께 문을 닫았다. 한국 교인들은 이것을 미쳐 모르고 있다가 방학이 가까이 와서야 비로소 알고 모두 화들짝 놀랐다. 한국 교회와 달리 네덜란드 교회들은 여름에 방학을 한다. 그래서 네덜란드 담당 공무원은 한국 교회도 방학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체육관을 빌리려고 시청에 찾아가 몇 달을 기다렸었는데 이제 와서 알려 주면 어쩌란 말이냐? 급하게 예배 드릴 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도움 받을 곳이 없었다. 한국 교인들은 몸 둘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기도만 했다.
50년 전 6.25 한국전쟁 때에도대한민국은 북한군의 남침에 속수 무책이었고 그 때에도 유엔군의 도움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그냥 앉아서 공산화 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지금 한국 교회 형편도 그랬다. 당장 7월이 되면 예배 드릴 장소가 없었고 누구에게도 도움 청할 곳이 없었다. 그 때 참전용사들은 모르는 척 하지 않았다. 50년 전과 같이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모두 나서 주었다. 마침내 니유란트(Mr. Jan Nieuwland)씨가 급하게 헤이그의 구세군 교회를 알선해 주었고 바로 7월
(구세군교회를 빌려 예배 드리던 시절 교우들) 첫 주부터 한국 교인들은 헤이그 구세군 교회(Haverschmidtstr. 57, 2522 VL Den Haag)를 빌려 예배 드릴 수 있었다.
‘그까짓’ 참전용사들이라 했던가? 똑똑한 서울 젊은이가 비아냥 했던 ‘그까짓’ 참전용사들은 50년 전에도 기꺼이 피 흘려 한국인들을 도우려고 달려 왔었고 지금도 마음 다해 한국 교회를 돕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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