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 물려 주신 세 가지

아버님이 물려 주신 세 가지

나는 아버님의 얼굴을 모른다. 내가 만 네살 때 아버님은 주님 나라로 가셨다. 아버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게남겨 주신 세 가지는 평생 나를 떠나지 않았다. 첫째 내 이름, 둘째 내 거정눈, 셋째 내 목숨이다. 재산 대신 신앙도 물려 주셨다.

첫째, 내 이름은 ‘창기’,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 21: 31). 나는 친구들에게 내 이름이 성경에 나온다고 자랑했다. 후에 ‘창기’는 ‘창녀’란 뜻이란 것을 알고부터 내 이름이 창피했다. 신학생 시절 내 이름과 비슷한 이창규 교수는 수업시간 출석을 부르시다 내 이름을 부르시곤 놀림 받지 않도록 내게 이름 바꾸기를 종용하셨다. 나를 위해서 하신 말씀이지만, 망신스러웠다. 내가 군목시절 ‘사창리’에서 근무하게 되자 친구들은 ‘창기가 사창리로 갔으니 고기가 물을 만난 셈’이라고 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껏 내 이름을 고수한다. 아버님이 지어주신 그 이름 ‘창기’ (昌基)를 고집한다. 그가 기도하며 지으신 본래의 뜻대로 ‘번영의 기초’, ‘昌基’가 되기를 소원하며…. 그래서, 영문 이름도 군더더기 없이 그냥 ‘Chang Ki’다.

둘째, 나는 거정눈, 아버님은 나보다 더 심한 거정눈이셨다. 내가 놀림 받을 때마다, 그리고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나는 나보다 더 힘드셨을 아버님을 생각한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리곤 힘을 얻는다. 다행히 나는 의술의 도움을 많이 받아 보기 좋아졌다. 그러나, 나의 아버님은 평생을 심한 거정눈으로 불편하게 사셨다.

셋째, 아버님은 내 육신의 목숨, 나를 살려 주셨다. 나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음력 윤5월에 태어났다. 부모님은 원주 근방 노루골이라는 곳에서 피난하셨다. 멀리 기차 철로가 보였고 앞에는 강이 흘렀다. 식구들은 먹을 것이 없어 끼니를 걸렀고, 어머님의 젖이 나오지 않자 갖난 아기였던 나는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숨을 할딱거리는 나를 바라보며 어머님의 눈에는 걱정과 절망이 가득하셨다. 마침 원주 강에 홍수가 났다. 상류에서 각종 물건들이 떠 내려오던 중 아마도 미군부대에서 내려온 듯한 드럼통이 하나가 떠내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만 하고 있을 때 우리 아버님은 망설임 없이 강물로 뛰어 드셨다. 물살이 워낙 거세서 아버님은 드럼통을 붙잡고 밖으로 나오지 못한채 멀리 흘러만 가셨다.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멀리 시야에서 사라지는 아버님을 바라보고 안타까와 했다. 모두 죽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우리 아버님은 몇 십리를 필사적으로 드럼통을 붙잡고 함께 떠 내려가시다가 마침내 드럼통을 끌고 강가로 나오셨다. 굶주린 아내와 그 아들, 이 목사를 생각하면서…. 그 드럼통에 기름이 들어 있었고 그것을 팔아 쌀을 사서 끼니를 해결하셨다. 나는 아버님의 헌신으로 어머님의 젖을 빨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모님의 고향 화천군 원천리가 공산 치하에서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부모님은 다시 고향 땅 원천으로 돌아오셨고 나는 원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왜 촌 구석으로 다시 오셨을까? 기왕에 외지로 나간 김에 서울이나 ‘버덩’ (강원도 사투리, 넓은 곳을 말함)에 정착하셨더라면….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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