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저 년들 좀 혼내 주세요>

<목사님, 저 년들 좀 혼내 주세요>

 

“목사님, 그년들이…. 참…. 어이가 없어서….” 여선교회장의 전화다. 어이가 없기는 목사도 마찬가지…. 목사는 더 어이가 없다. 그러나,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미 하루 전에 다른 집사를 통해 ‘놀라지 마시라’며 미리 대략적인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교우들 사이에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독일 바드 크로이츠나하 교회에 부임한지 약 7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1992년 2월10일 동부연회 박성로 감독을 모시고 춘천 신성감리교회 (담임: 김창수 감독)에서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리고 독일 선교회1)의 파송을 받아 아내와 두 아이들을 데리고 2월 19일에 독일에 도착, 바드 크로이츠나하라는 시골 교회에 부임하였다.

주1{독일선교회: (회장: 김창수 감독, 총무: 유호선 목사)는 춘천 지역을 중심으로 이창기 선교사를 아는 목회자들이 이 선교사의 독일 선교를 돕기 위해 조직, 1992년 2월부터 한국에서 IMF사태가 터져 한국 경제 사정이 어려울 1998년 3월까지 매달 미화 1000불 씩 후원하였다. 김창수 감독을 비롯한 독일 선교회의 후원 덕분에 바드크로이츠나하 선교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고, 특별히 총무 유호선 목사는 헤이그이준기념교회를 봉헌할 때,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감리교회의 보일라를 교체할 때, 등 경제적으로 큰 돈이 필요할 때마다 아낌 없이 지원해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 전한다.} 

대략 20여명의 출석 교우들 중 한국인 가정 한 가정을 제외하곤 모두 국제 결혼한 한국인 여성들이었으며 그 중 한 여인은 독일인과 결혼했고 나머지 모든 여성들이 독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과 결혼한 여성들이었다. 당시 독일에는 미군 부대가 많았고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이 독일 여러 곳에 있는 한인 교회에 출석하면서 독일 내의 한인 교회 부흥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도 그 중에 하나였다. 

사건은 얼마 전에 미국에서 새로 온 풍체 좋으신 한 평신도로 시작된다. 그 여인은 두 아이의 엄마로 매일 유모차를 끌고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여러 소식들을 전하기에 바빴다. 주로 하는 이야기는 지난 날 한국에서 살 때에 있었던 일들이었다. 자신은 어느 바 (Bar, 술집)에서 일했고, 지금 우리 교회에서 집사로 봉직하고 있는 여러 집사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그들이 과거에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미주알 고주알 떠벌리고 다녔다. 지난 날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먼저 교회에 출석해서 집사의 직분으로 봉사하는 모습이 꽤나 부러웠고 시기가 됐던 모양이다. 

해방 후 남한에 많은 미군들이 주둔하면서 미군 부대 근처에는 미군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가 제법 짭짤하여 그 도시의 경제를 살리고 번창하게 하였다. 미군들이 많이 찾는 기념품 가게나 식료품 가게, 웃 가게 등도 생겼지만, 특별히 남성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바들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그들에게 유흥을 제공할 많은 여성들이 그곳으로 몰려 들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가난에 찌들었다. 가난한 여성들, 전쟁으로 보호자 잃은 여성들, 부친이나 오빠들의 학대에 시달린 여성들, 불쌍한 여성들이 몸 의탁할 곳을 찾아 몰려 들었다. 그들은 미군들에게 유흥을 제공하며 술도 팔고 웃음도 팔았다. 운이 좋으면 그들과 눈이 맞아 살림도 차릴 수 있었고 결혼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살 수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들에게는 미국으로 건너가 사는 것이 로망이었고 꿈이었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에게 국제 결혼이란 지긋지긋한 가난과 굶주림, 권위적인 남성 식구들의 억압과 폭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다시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국제 결혼은 한국 여성들에게는 성공의 길이었고 출세의 길이었으며 가파른 신분 상승의 길이었다. 우리 교우들은 그렇게 미군들과 결혼에 성공한 여성들이었고 남편 따라 독일까지 온 분들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프라이드를 가질만 하였다. 남편들이 국제적으로 인정 받는 세계 최강의 현역 미군들인데다 해외에 근무하는 미군들에게는 많은 혜택과 특권이 주어졌다. 봉급 외에도 해외 근무 수당도 나왔고 주거 비용과 그 외에 받는 혜택이 많았다. 그러므로 미군 가족이라는 신분은 한국인들이나 독일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특별히 미군부대 피엑스 (P.X.; Post Exchange)는 그 지역 경제를 뒷받침 해주는 주요 거점이 되었고 피엑스에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특권이었다. 

외관상 그러하지만, 내면적으로 그들에게도 고민과 아픔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국제 결혼의 화려함 속에는 실망과 고민도 컸다. 국제 결혼이란 인생에서 큰 도박과 같은 것이다. 언어가 다르고 생활 습관과 문화가 다른 사람과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항상 남편들에게 언제 이혼 당할지 모르는 불안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국제 결혼을 하게 된 동기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보다 넓고 잘 사는 자유스러운 나라에 대한 동경과 꿈이다. 나는 두 분에게서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 아니라 보다 잘 사는 나라 미국에 오고싶어서 미국인 남편과 결혼했노라는 말을 들었다. 그 중 한 분은 큰 아이가 네 살, 작은 아이가 두 살인데 아직도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있으며 언제라도 남편과 이혼할 준비가 돼 있노라고 했다. 곧 미국으로 들어갈 것인데 들어가자마자 이혼하게 될 것 같다는 말도 했다. 나는 가정과 남편을 귀하게 여길 것을 간곡히 부탁하며 그녀를 보냈다. 

또 다른 여인은 딸만 둘을 두었다. 그녀도 남편을 사랑해서라기 보다 미국에 오고 싶어서 결혼했노라고 했다. 결혼도 이혼을 전제로 했고 지금도 이혼을 대비해 여러 조치들을 강구해 놓았다고 했다. 남편도 부인을 가까이 하지 않아 바람나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으며 두 딸들도 엄마를 멀리하고 있다고 했다. 몇 번씩 이혼하겠다고 말했고 그 때마다 나는 간곡히 가정 지키라고 권했는데 고맙게도 그녀는 목사의 말에 열심히 순종하려고 했다. 후에 두 딸들이 자기에게 가까이 하자 봅시 감격하기도 했다.

둘째, 외국을 도피처로 삼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외국으로 나가기 위해 국제 결혼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요즘은 한류 바람에 많이 달라졌으나 지난 날에는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인 만나기를 꺼려하고, 또는 심지어 한국어를 아예 쓰지 않고 사는 이들, 한국인이 아닌 척 하며 사는 이들, 한국인이라면 증오하며 멀리하는 이들도 있었다. 

흔히 그런 이들을 민족의식도 없는 천박한 사람들로 낙인찍고 비난하기 쉬우나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기 전에 그들이 조국으로부터 받은, 동족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관심써야 할 것이다. 그들도 한국의 딸들, 우리의 딸들인데 조국은 그들을 정말 딸들로 대우했을까? 곱지 않은 눈초리로 대했고 소위 “양색시”니 “양공주”니 하대하며 경멸하지 않았나.  

유교의 성리학에 찌든 한국 문화는 특히 여성들의 성적 권리를 무시하고 그들이 처했던 경제적, 사회적, 시대적 궁핍과 개개인의 피치 못할 사정은 차치하고 엄격한 성적 윤리만을 강요한 나머지 국제 결혼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여간 심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그들에게 가혹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 8: 11) 말씀하셨다.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예수께서는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지만 (요 5: 27), 그 심판의 권세를 행하신 적이 없고 죄인들을 향한 용서와 사랑만을 베푸셨다. 

나는 그분들을 모시고 목회하면서 그분들에게 감동을 끼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들로부터 많은 감동을 받았다. 교회 일에 얼마나 헌신적인지, 얼마나 열심히 순종하는지,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하며, 봉사하는지 모른다. 그 뜨거움, 그 순진함, 그 열심, 지금도 살아있는 막달라 마리아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다. 그것도 담임 목사 모르게…. 목사에게 알리기에는 너무 창피스러운 얘기들이기 때문이리라. 네 말이 맞니 내 말이 맞니 사실 확인을 하면서 사태는 더욱 커졌다. 두 편으로 나뉘어 싸움이 진행되었고 점점 격렬해져 갔다. 폭발 임계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목사에게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많지 않은 교인들이 둘로 나뉘어지게 생겼다. 교회는 둘로 쪼개지고 파탄나게 생겼다.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중재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았다. 기도하는 수 밖에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 아뢰는 수 밖에 없었다. 기도하면서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으로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는가 절망적은 생각이 들었다. 유럽 선교의 큰 꿈을 안고 왔지만 1년도 못돼 다시 한국을 돌아가야 될 판이다. 혼자 고민하며 애쓰는 중에 여선교회 회장한테서 전화가 온 것이다. “목사님, 그년들이…. 참…. 어이가 없어서….”

“오늘 저녁 목사님 댁에 방문 좀 해도 돼요?” “그럼요. 저녁에 오세요.” “근데…. 목사님…. 제가 혼자가 아니고 우리 교인들이 모두 갈 거예요.” “무슨 일로 그렇게 갑자기….” “목사님, 아…. 글쎄…. 그년들이 온통 교인들을 뒤집어 놨어요. 대판 싸움이 났어요. 목사님…. 우선 목사님 댁에 모두 모여 누가 잘 했는지 목사님 앞에서 따져 볼 거예요. 목사님은 양쪽 말을 다 들으신 후에 누가 잘했는지, 누가 잘못했는지만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잘못했으면 저희가 사과하고 저년들이 잘못했으면 저년들이 사과하기로 했어요. 그리 아시고 준비하고 계세요.” 

저녁이 되자 교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평소 다정스럽게 웃음으로 대했던 우리 교우들, 그러나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살기가 느껴질만큼 살벌하기 그지 없다. 여선교회 부회장 집사는 내게 녹음기 챙기는 것을 잊었다며 녹음기를 빌려 달란다. 그 이유를 묻자 하는 대답이, “나중에 저년들 딴 소리 못하도록 녹음”하기 위해서란다. 

예배나 기도 없이 자리에 앉자마자 양측은 먼저 서로 다짐부터 했다. 각자가 목사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나누되, 마지막에는 목사의 판단에 절대적으로 따르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누구든, 어느 측이든, 목사가 사과하라면 사과하고 용서를 빌라 하면 용서를 빌기로 했다. 그나마 양측 모두 이 목사님을 깊이 신뢰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다행이다. 

양측이 격렬히 싸우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끼어들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조용히 앉아 듣기만 했다. 아니다.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주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대로 가면 교회를 세우기는 커녕 멀쩡한 교회 하나가 깨어지게 생겼습니다. 내게 지혜를 주세요. 어떻게 해야 교회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두 패가 갈려 싸웠다. 처음부터 상스러운 욕으로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새 험악한 말이 오가기 시작했고, 인격적인 모욕, 욕설, 상대의 추했던 과거의 일들, 담임 목사가 들으면 안 될 말들도 쏟아져 나왔다. 그럴수록 내 속에서는 절망의 탄식이 흘러 나왔다. “주님, 이제 도저히 저들을 치료하고 위로하고 보듬기는 글렀습니다. 저렇게 추잡한 일들을 목사가 다 알아 버렸는데…. 저들이 목사의 말을 듣겠습니까?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날 도와 주세요. 내 입에 말씀 심어 주세요. 내게 능력 주세요. 무엇보다 주님의 긍휼의 마음을 부어 주세요.”

장장 세 시간 넘게 싸우다 자정 무렵 돼서야 집에서 기다릴 남편들과 자녀들이 생각이 났나보다. 모두 마음이 급했다. 목사에게 빨리 판결해 달란다. 단칼에 결정해 달란다.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했는지 판결해 달란다. 5분 내로…. 

나는 아주 짧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내가 주님께 받은 고귀한 직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화목케 하는 직책” (고후 5: 18)이라는 것, 그러나 오늘 저녁에 보니 내가 교회를 화목케 하기는 커녕, 교회를 싸움판 만들었다는 것, 그래서, 주님 앞에서 내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얘기했고 다음 말을 덧 붙였다: 

“여러분은 내게 판결해 달라고 했지만, 판결의 자리, 재판장의 자리는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앉으실 자리입니다. 나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인입니다. 여러분은 내게 판결해 달라고 왔지만, 잘못 오셨습니다. 나도 여러분과 똑 같은 죄인이라 판결 받으러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 여러분의 말을 들어 보니, 그동안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리,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이웃들을 자주 정죄하셨군요. 내가 여러분들을 잘 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회개하고 여러분들께 용서를 구합니다.”

둘째,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이 모두 이해가 돼서 그 아픔과 속상함에 동감이 되더라고 말했다. 주를 믿고 새 사람되어 교회에 직분을 받아 정성껏 믿음 생활하고 있는데 지난 날의 일로 다시 정죄 당한다면 그 상처가 얼마나 컸겠는가? 나 같으면 그런 정도의 욕이 아니라 그 보다 더한 심한 욕설도 했을 것이고 어쩌면 믿음에서 떨어졌을지 모른다. 그들의 행동과 언어 모두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셋째, 마지막으로 내가 말했다: “내가 상처 많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며 어떻게 회복시켜야 할지 고민이 되고 주님께 그것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목사가 여러분들의 감추고 싶은 과거까지 다 알아 버렸으니 다시 목사 얼굴을 보려고 하겠습니까? 내 힘으로 여러분들을 다시 고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도록 우리 기도합시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다.

모두 무릎을 꿇고 내가 대표로 기도했다. 내가 먼저 회개했다. 교우들을 화목시키지 못한 것, 잘 가르치지 못한 것, 잘 보살피지 못한 것부터 회개했다. 그리고 교우들이 하나님의 자리, 재판장의 자리에 함부로 앉아 이웃들을 정죄했던 것도 회개했다. 그러자 여기 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기도를 마치자 잠시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어떻게 그들을 화해시킬지 몰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들의 방식대로 자기들끼리 화해를 하기 시작했다. “야…. 이 쌍년들아…. 내가 잘못했다.” “아니야, 이 쌍년아…. 너 보다 내가 더 잘못됐어.” “내가 더 잘못했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잘 했다고 싸우더니 이젠 서로 더 잘못했다고 언성을 높이며 싸워댔다. 그러나, 싸우면서도 서로 포옹을 했고 가볍게 서로 주먹으로 치며 끌어 안았다. 그들 얼굴에는 눈물과 함께 웃음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독일 주택가의 늦은 밤은 깊은 정적이 흐른다. 현관에 널린 신발을 찾아 신고 파킹한 차로 모두 떠나면서 한참 웅성거렸다. 사택을 떠나면서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나는 그들 귀너머로 들을 수 있었다. “야…. 이년들…. 창피해 죽겠다. 다시는 목사님 앞에서 이짓들 하지 말자.”

그 다음 주일 아침 교회를 향하며 걱정이 태산 같았다. 교인들이 내 얼굴을 어떻게 쳐다 볼 수 있을까…. 모두 뒤로 숨지 않을까…. 시험들어 교회에 빠지는 성도는 없을까…. 그냥 웃고 넘어갈 한 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완전히 없던 일로 여겼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나의 어리석은 기우였다. 교우들은 이편 저편 없이 나를 반겨 주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출장 다녀 온 아빠에게 달려들듯이….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또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그들을 맞았다. 잃어버렸던 사랑하는 딸들을 다시 찾았듯이 그들을 안아주었다. 그들이야 말로 주님이 사랑하신 주의 자녀들이고 주의 양들이자 주님이 말씀하신 소자들이다. 그들을 무시하면 주님께서는 나를 무시하실 것이고 그들을 존중하면 주께서 나를 높여 주실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지난 주와 이번 주가 다르지 않았다. 같은 목사, 같은 교우들이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나는 바드 크로이츠나하 교회에서 ‘희락’을 경험하였다. 교인들이 예배를 사모하는 것은 물론, 예배 후에도 집에 갈 줄을 몰랐고, 한 없이 교회에 있고 싶어하고, 헤어지는 인사를 하고 또 하고 몇 번씩 하곤 간신히 집으로 떠났다. 예배와 교제와 봉사가 한 없이 즐거웠고 기쁨이 넘쳤다. 

여선교회는 한 달에 한 번, 어느 때는 두 번, P.X. 근처에서 룸피아를 만들어 팔아 선교비를 마련했고, 회원들 중에는 이사하는 방 청소며 아파트 통로 청소를 해서 선교비를 마련해 헌금하기도 했다. 청소가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K집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목사님…. 저는 그렇게 지저분하던 방이 깨끗이 정돈된 모습을 보면 그렇게 뿌듯하고 행복할 수가 없어요. 전혀 힘든줄 모르겠어요.”

불과 20명이 안 되는 교인들인데 마음이 하나가 되다 보니 그 파워가 엄청났다. 당시 지방 1년 예산은 8천 마르크인데 우리 교회에서 지출된 선교비는 1만 2천 마르크가 넘었고 그 모든 헌금은 지방 약한 교회 목사님들 선교를 위해 모두 지출되었다. 나는 선교비 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가져오는 쌀포대며 과일이며 통조림 등 먹거리들을 차에 실어 나르기에 바빴다. 승용차로 독일 거의 전역을 누비다시피 하였다. 

그 다음 해엔 지방 준회원 진급 심사를 우리 교회에서 유치하여 준회원 목사님들을 섬기기로 하였다. 관광지 바드 뮌스터에 호텔을 빌렸고 목사님들의 모든 수건, 양말, 속옷, 등 필요한 모든 것들을 우리 교인들이 직접 준비해서 1주일 동안 푹 쉬고 연구하도록 봉사하였다. 장래의 목회자들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천한 종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쪼개질 수 밖에 없던 교회, 위기에 처했던 교회를 다시 일으켜 주신 우리 주님께 무한 감사드리며, 성령의 감동에 온전히 순종하여 한 마음으로 주님 섬기고 헌신한 모든 바드 크로이츠나하 교우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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