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눈물의 힘
이 기도회를 나는 실패작이라고 단정했지만 그것은 속단이었다. 그 날 교우들은 콕스호른씨로부터 아무런 무용담도 듣지 못했지만 그의 눈물과 감격을 보았던 것이다. 아니 그의 속 마음을 본 것이다. 작은 감사 표시가 상대를 얼마나 감격시킬 수 있는지 감사의 힘을 본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감격하게 만들었을까? 이 행사는 교우들 마음 속에 깊은 여운을 남겨 놓았고 그의 감격은 교우들 마음 속에 또 다른 감격을 전염시키고 있었다.
(무용팀의 공연 모습)
교인들의 반응은 이 목사의 예상을 깼다. 내년에는 네덜란드 전국에 있는 참전용사들을 다 모시고 위로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가능하기나 한가? 네덜란드 전국에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몇 분 계시는지도 모르고, 그 분들의 연락처도 모를 뿐만 아니라 설령 안다 하여도 몇 분이 오실지도 모르고 또 만약 많은 분들이 혹시 몇 백 명이 몰려 온다면 어떻게 감당할까? 적은 숫자의 교우들로 어떻게 그런 무모한 일을 하느냐 그 말이다. 공연히 망신 당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자…. 그게 이 목사의 생각이었다.
때론 ‘침묵이 웅변보다 강하다’ 했던가? 때론 눈물의 힘이 웅변보다 더 강할 때도 있는가 보다. 전쟁을 겪은 분들 말씀이 전우의 죽음을 곁에서 본 병사들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격을 한다고 한다. 어른의 눈물을 본 교우들이 그랬다. 눈물의 힘이다. 여선교회장 이성자 집사를 비롯한 여성들이 앞장 섰다. 두 시간 거리나 되는 먼 곳에서 교회를 찾아 오는 오연숙 집사, 말 없이 섬기는 이갑순 집사, 모두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이갑순 집사는 매해 불고기와 대구전을 책임졌다. 무용을 하는 김선남 집사와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김명희 집사와 김은정 집사가 여성 회원들을 동원하여 한국의 고전 무용을 준비하였다. 천주교 신자인 김영국 태권도 사범은 네덜란드 북쪽 2시간 거리 알메레에서 제자들과 두 딸들을 데리고 와 태권도 시범을 보여 주었다.
이 목사가 네덜란드에 있는 동안(1994~2011) 두 친구를 사귀었다. 한 분은 콕스호른 씨, 그는 찾아 와 친구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처음엔 당황했다. 그 분은 연세가 68세, 이 목사는 43세, 한국 식으로 하면 말도 안 된다. 친구라니? 그러나 이 목사는 그의 친구 요청을 수락했다. 나이와 국적을 떠난 친구였다. 하링이라는 네덜란드 정어리 절임을 먹으며 친구의 연을 맺었다. 네덜란드에 하링을 먹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암스텔담 식, 그것은 접시에 하링을 조각 조각 썰어놓고 포오크로 찍어 먹는 젊잖은 방식이고, 로테르담 방식, 그것은 하링 꽁지를 손가락으로 집어 공중 높이 하여 거꾸로 머리 쪽부터 입에 넣어 입으로 잘라 먹는 좀 야성적인 방식이다. 콕스호른씨는 이 목사에게 로테르담 방식을 가르쳐 주었다. 2007년 11월 19일 그가 세상 떠났을 때 이 목사는 그의 장례식에서 기도하며 다정한 친구를 저 세상에 정중히 보내드렸다. 그의 운구를 이 목사는 거수 경례로 떠나 보냈다.
또 한 친구가 바로 김영국 사범이다. 그가 이 목사에게 친구 요청을 했다. 개신교와 천주교 종교를 떠나, 목사와 평신도 신분을 떠나 그와 친구가 되어 친구로 지냈다.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그의 부인은 이 목사 사모와 친구가 됐고, 그의 순박한 두 딸들도 이 목사 딸과 다정한 친구가 되어 지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해외의 나그네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곤 하였다.
이준기념교회 이미리 집사에 따르면, 하링을 잘라 먹는 암스텔담 방식의 기원은 하링이 항구로 들어 올 때 모두 모여 먹었던 데서 기인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고 그들에게도 나눠 주기 위해 잘라 먹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쉬러이덜스 퇴역 대령)
콕스호른씨 중재로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용사회 (Netherlands-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 사무총장으로 계시는 퇴역 대령 쉬러이덜스{Col. Leendert C. Schreuders(ret.)}씨를 알게 되었고, 슈루덜스 사무총장은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용사회 월간지 VOKS에 교회 행사를 광고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로테르담한인교회 행사는 교우들도 모르는 사이에 참전용사회에서 관심 갖는 행사가 돼 버렸다.
눈물의 힘은 거침 없이 행사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초조하고 불안하였다. 이런 행사도 처음이거니와 30명 교인들을 데리고 행사를 하려니 버거웠다. 아무 지원도 없었다. 경비뿐만 아니라 걱정거리가 이어졌다. 영국 스콧치 장로교회 건물을 빌려 쓰고 있는데 행사 할 공간이 그렇게 넓은 교회가 아니었다. 70명 이상은 수용할 수가 없었다. 70명 이상 오시면 어떻게 감당할까? 제발 60명은 넘지 말아야 하는데…. 걱정은 계속 됐다. 네덜란드 고급 문화 속에 사는 이들이 한국 교인들이 보여줄 불고기와 태권도와 한국 무용들을 보고 즐거워할까? 만족할까?
감사가 감격을 낳고 감격은 엄청난 쓰나미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이듬 해, 그러니까 1996년 6월 23일, 참전용사들이 제복을 입고 한 분 두 분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부부 동반하신 분 등 모두 6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 날, 지금은 고인이 되신 네덜란드 한국전 총 사령관이었던 전설적인 영웅 탁 장군(General G.N. Tak)도 함께 참석해서 예배 중 한국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해 주었다. 키는 작았으나 눈매가 매섭고 다부지었다. 6.25 전쟁 당시 사령관으로서 몇 번이나 죽음을 넘나드는 최전선을 겁 없이 누비었단다.
(탁 장군 미망인과 탁 장군의 아들, 탁 현역 대령)
이 행사의 성패를 확인하는 방법은 쉬웠다. 참전용사들을 맞이하는 교우들의 얼굴을 보면 안다. 불고기를 볶는 그 손길을 보면 안다. 접시를 나르는 그 발걸음을 보면 안다. 무용 연습을 하다 삔 발목으로도 발표에 빠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 안다. 그러나 가장 분명하게 확인하는 방법은 참석하신 참전용사들의 반응을 보면 안다.
(무대에 올라 함께 아리랑 춤을 추는 참전용사들)
가장 극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나타났다. 김선남 집사가 장구를 치며 아리랑을 부르자, 이게 웬일인가? 몇몇 참전용사들이 아리랑을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한국말을 모르는 분들이 아리랑은 알고 있었다. 따라 불렀다. 몇몇 참전용사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강단으로 뛰어 올라 장단에 맞추어 팔을 흔들며 한국식의 아리랑 춤을 추었다. 얼떨결에 이 목사도 올라 춤을 추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까지도 매 해 참전용사 위로회는 늘 아리랑 군무로 끝을 맺는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기뻐 춤추는 참전용사들을 보면서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네덜란드 천주교회 빌메링(Vater T. Wilmering) 신부는 그 이듬 해에 축도를, 그 다음 해에 설교를 해 주었다. 네덜란드 주재 대한민국 대사 권인혁 씨는 그 이듬 해에 축사를 해 주었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 네덜란드 대사관에서는 대사나 아니면 공사가, 때로는 베를린의 대사관의 무관, 혹은 벨기에 대사관의 무관이 늘 행사에 참석하여 관심을 보였다. 네덜란드 정부를 대표해서도 네덜란드 시장이 늘 행사에 참석하여 관심을 보였다.
한국 교우들의 작은 감사 표시가 참전용사를 울렸고 그의 눈물은 교우들의 마음에 불 붙이고 네덜란드 참전용사들의 마음에 불을 붙여 한국 바람이 불게 하였다. 밤새 고기를 볶던 교우들, 무용 연습 하느라 발목도 삐고 옷도 망치고 신발도 잃어 버렸던 그들, 멀리 찾아 와 준 김영국 태권도 사범, 모두 고마운 분들이다.
(국방 무관 김종진대령 내외, 참전용사들과 함께)
로테르담한인교회 교우들도 이 목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한국 문화의 전도사, 한국 국위를 선양하는 외교관이 되어 있었다. 콕스호른씨의 눈물의 힘이었다. 아니 이 모든 것이 그를 감동하시고 이끌어 사용해 주신 주님의 은혜 덕분이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려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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