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비겁해
 
해외에서 살다 보면 한국에서는 겪지 못했던 일들을 참 많이 겪는다. 그중에는 기쁜 일도 있고, 억울한 일, 황당한 일, 부끄러운 일 등 여러 가지 사연들이 있다.
 
나와 우리 가족은 처음 독일의 바드 크로이츠나흐 시골 마을에 도착해서 슈퍼마켓을 찾았다. 우리가 독일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한국은 아직 후진국이었고 독일은 선진국이었다. 더구나 한국 춘천에서 개척교회를 하며 살던 우리는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해서, 제대로 된 슈퍼마켓에 가 본 적조차 없었고, 슈퍼에 카트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우리는 한국에서도 촌사람이었고, 독일에 와서도 여전히 촌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넓디넓은 마트 구석구석을 살피며 그 크기에 놀라고, 진열된 수많은 물건들에 또 한 번 놀랐으며, 무엇보다 카트의 편리함에 감탄했다. 한국에도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 한국에도 이미 카트가 있었단다. 우리는 가족이 뭉쳐 다니며 필요한 물건을 카트에 담았다.
 
마트 한 구석에 노랗고 주먹만 한 동그란 플라스틱 병이 진열되어 있었다. 보기엔 쥬스 같은 음료수 같았다. 마침 네 살이던 아들 종율이가 목이 말랐는지 그 병을 집어 들었다. 사실 그건 쥬스가 아니라, 원액을 10배의 물에 희석해서 음식에 뿌리는 레몬 원액이었다. 우리는 그걸 한 입에 꿀꺽 마실 수 있는 음료수쯤으로 착각했다. 모양은 꼭 수류탄처럼 생겼고, 나는 농담 삼아 “다 마시면 장난감 수류탄으로 쓰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종율이에게 병을 건네며, 계산을 마친 뒤에 가지라고 일렀다. 종율이는 자기 것이라는 말에 신이 나서 병을 계속 주시했고 계산되기만 기다렸다. 병이 계산대 벨트를 지나자마자 종율이는 다급하게 병을 챙기려다, 그만 병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짹!” 하는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 통이 깨지며 내용물 일부가 새어 나왔다. 그래도 병 안에는 레몬 원액이 아직 꽤 많이 남아 있었다. 독일에서 처음 사 본 음료수라 우리에겐 귀한 것이었다.
 
나는 종율이에게 말했다.“종율아, 아까운 거니까 네가 마셔. 깨졌지만 네 거니까 너만 마셔야 돼.”
종율이는 병뚜껑을 열어 입에 대고 조금 맛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울상을 짓고 펄쩍펄쩍 뛰었다. 나는 병을 빼앗아 아홉 살 누나 미리에게 건네며 말했다.“사내녀석이 그게 뭐냐. 누나가 얼른 마셔. 사람들이 본다. 창피하니까 빨리 마셔.”
 
미리는 용감하게 병을 열어 조금 입에 대더니, 종율이보다 나을 게 없었다. 마찬가지로 펄쩍 펄쩍 뛰었다. 그 무렵 주위의 독일 사람들이 하나둘 멈춰서서 우릴 보고 있었다. 동양인이 드물던 시골 마트에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모두 ‘동작 그만’ 상태였다. 아… 정말 창피했다.
 
마침 아내가 계산을 마쳤다. 나는 아까운 레몬 원액 병을 건네며 말했다.“원, 애들이 저래요. 당신이 얼른 마셔요. 어른이 마셔야지… 다들 우리 쳐다보잖아요. 창피해 죽겠네.”
 
나는 차마 귀한 것을 내가 마시지 않고 아내에게 넘겼다. 다른 물건들은 다 카트에 실었고 계산도 마쳤으니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내조차 병을 열고 맛을 보더니 쩔쩔매는 것이 아닌가. 와… 진짜 환장할 노릇이었다. 너무 창피해서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아니…. 어른 조차 원….
 
나는 아내 손에서 병을 낚아채 단숨에 마시려고 병뚜껑을 열었는데, 그런데…. 그 순간 병에서 올라오는 지독한 레몬 원액 냄새가 내 코를 후벼팠다. ‘앗차! 그게 아니네….’ 나는 그제서야 알았다. 이건 절대로 그냥 마시는 게 아니구나!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뚜껑을 닫았다. 집에 가서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카트를 끌며 식구들을 재촉했다. “빨리 가자! 집으로 가자!” 그 순간 아이들이 뒤에서 소리쳤다.“아빠도 마셔요! 왜 우리만 마시게 하고 아빠는 안 마셔요! 아빠 비겁해요! 얼른 마세요.”
 
소리 소리 지르는 아이들을 뒤로 한채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독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슈퍼마켓을 탈출했다.그렇게 나는, 독일에 오자마자 비겁한 아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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