깝데기를 벗고….
고향 어른들은 껍데기를 깝데기라 했다. 몸을 가린 옷을 홀딱 벗었을 때 깝데기를 벗었다고 말한다. 사업이 완전히 망했을 때도 ‘깝데기를 벗었다’고 말한다. ‘깝데기 헌금’이란 모든 옷을 홀딱 벗듯이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 없이 주께 드리는 헌금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처음으로 깝데기 헌금을 하며 사창리를 떠났다. 옷을 홀딱 벗듯이 모든 돈을 톡톡 털어서 몽땅 드리고 사창리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그 깝데기 헌금의 엄청난 효능을 맛 보았다.
우리 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사창리 냄비골에는 난봉꾼 한 분이 사셨다. 화전민으로 살면서 부인과 두 남매를 키웠는데 술과 놀음을 좋아하고 동네에서 싸움을 잘했고 난동 부리기 일쑤였다.
한 번은 연대 앞 산에 불을 놓아 연대 군 병력이 불끄러 출동하기도 했고 부연대장이 주관하는 회의에서 그 어른의 처벌이 논의 되기도 했다. 그는 가정에서도 폭력을 일삼았다. 부인과 아들과 딸에게 수시로 폭력을 휘둘러 아들과 딸도 밖으로 나돌았다.
그 부인이 교회에 열심히 나왔으며 남편에게 시달려서인지 험하게 늙으셨고 몸도 쇠약해 보였다. 가끔 도시에 나가 일하던 딸도 집에 올 때에는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였다.
내가 진해로 발령이 나고 내 마음이 어수선할 때에 군종 사병을 통해 갑자기 그 딸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서울에서 내려와 중학교를 다니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아빠의 폭력 때문에 서울에서 공장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적령기가 약간 지나긴 했지만 더 늦기 전에 공부를 하려했고, 그런데 돈이 부족하다고 했다.
남의 일이 같지 않았다. 내 일처럼 느껴졌다. 성령의 감동이라 믿고 나는 급하게 군종사병을 통해 내 호주머니에 있는 모든 돈을 그녀에게 보냈다. 마침 봉급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약간의 돈이 모여 있었다. 얼마나 필요한지 묻지 않았고 얼마를 보냈는지도 모른다. 갚을 생각하지 말고 학비를 위해 쓰라고 몽땅 보냈다.
나는 그 때 ‘깝데기 헌금’의 묘미를 처음으로 맛 보았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바치네” 헌금 시간마다 찬송은 많이 불렀으나 그 동안 그 깝데기 헌금의 뿌듯함을 실감해 보질 못했다. 그런데 막상 나의 ‘모든 것’, 몇 푼 되지 않은 것이지만, 나의 모든 것을 드리고 나니 세상 천지가 모두 내 것이 된 기분이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요 17: 10). 나 역시 똑 같이 고백했다. “내 것은 모두 주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것은 또한 내 것입니다.”
실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 32).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이미 내어 주신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에게 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없겠는가.
나는 그 후로도 몇 번 더 깝데기 헌금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감동과 기회를 주신 것이 내게는 큰 은혜였고 복이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다. 주님께서도 ‘두 렙돈’ 헌금한 과부를 칭찬해 주시지 않으셨던가 (눅 21: 1-4). 두 렙돈은 현재 한국 화폐의 시세로 따져 약 2천원에 불과하다. 과부는 2천원 헌금을 하고 주님께 칭찬까지 받으셨다. 나 역시 매우 적은 헌금으로 큰 기쁨과 만족을 얻었다. 전방 생활을 끝내고 모든 깝데기를 훌훌 벗고 나는 진해로 떠났다.
이것은 사실 자랑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것이 얼마 없어서 깝데기 헌금을 해 봤자 몇 푼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가진 재산이 많다든지 돈이 몇 십억이나 된다면 어떻게 깝데기 헌금을 하겠는가? 아마도 아까워서 못했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나의 가난은 내게 또 다른 축복이었다. 아무 때고 감동 주시는 대로 깝데기 헌금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주의 말씀은 내게 ‘아멘’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 20).
나는 그 딸도, 그 식구들도 보지 못하고 진해로 떠났고 연락은 모두 끊어졌다.
그러나 인연이란…. 참 묘한 것…. 진해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충청도 시골에서 4-5년 목회한 후, 춘천에 와서 목회할 때 나는 그 딸을 다시 만났다. 나의 어머니와 그의 어머니가 춘천 시내에서 길 가다가 우연히 서로 만난 것이다.
기적 같은 만남을 통해 그 딸은 감격하며 나를 대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내가 전방에서 진해로 떠난 후 내 연락처를 알고 싶어서 백방으로 수소문 했으나 알 길이 없었고, 나를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대하며 찾던 이 목사가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 그녀로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 때는 이미 그녀는 결혼을 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돼 있었다. 내가 춘천에 있는 것을 알고 남편을 데리고 내가 목회하던 교회를 찾았다. 예수 안 믿던 그 남편은 교회에 출석하면서 곧 바로 담배 끊고 술 끊으며 본격적으로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작은 ‘깝데기 헌금’은 그녀를 통해 몇 십배, 몇 백배로 내게 다시 되돌아왔다.
나는 당시 춘천 팔호광장 근처 동부시장 운교동 3층 상가에 월세를 내며 개척교회를 하고 있었다. 따로 사택을 마련하지 못해 강단 뒤에 널판으로 벽을 만들어 주방과 부엌을 만들고 주방에 딸린 기도실에 연탄 보일러를 넣어 침실로 사용했다. 가로 약 1미터, 세로 2미터, 두 사람 누으면 딱 들어맞는 공간이었다. 다행히 나와 집 사람은 체구가 적어 우리 둘과 딸 미리가 누으면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문제가 생겼다. 미리 동생 종율이가 태어난 것이다. 그 좁은 공간이 우리를 내 쫓았다. 갈 곳이 없었다. 주방이 침실과 부엌과 생활 공간이 된 것이다.
그녀는 우리를 끌어내어 춘천 산동네 좀 넓은 방으로 이사를 시켰다. 그녀의 빠듯한 살림 살이를 뻔히 알고 있었던 나와 집 사람은 극렬히 반대했으나 그녀의 강제적인 힘에 이끌려 결국 우리는 이사를 당했다.
얼마의 비용이 들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그녀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드린 것만 안다. 그래서 목사 가족을 넓은 방으로 이주시켰다. 그녀도 나처럼 ‘깝데기 헌금’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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