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전쟁 (충청도 농촌교회 목회기)

신혼 전쟁

사람들은 흔히 신혼을 달콤하다고 말한다. ‘허니문(honeymoon)’이라는 말도 결혼 후 한 달은 꿀처럼 달콤하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에게 신혼은 달콤함보다는 전쟁에 가까웠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들이 있었다.

첫째, 우리는 연애를 해보지 못했다.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사귐의 시간이 전혀 없었다. 처음 만나 사흘 만에 약혼했고, 약혼한 지 불과 2주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자마자 곧바로 떨어져 지내야 했고, 약 4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함께 신혼살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도 몰랐다.

우리의 결혼은 중매 결혼의 단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서로를 잘 모른 채 시작한 결혼 생활은 크고 작은 마찰과 충돌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우리는 결혼 초기에 많은 어려움과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다.

우리 둘은 존경하는 목사님을 통해 중매로 소개받았다. 그분을 깊이 신뢰했기에, 그분이 믿고 소개해주는 상대라면 우리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거절할 이유조차 찾지 못한 채, 너무도 빠르게 약혼하고 결혼에 이르렀다.

그 바람에 우리는 학벌이나 가문, 성격이나 취미, 기호나 가치관, 경제적 능력 같은 중요한 조건들을 알아볼 틈도 없이, 말 그대로 전광석화처럼 결혼을 결정했다. 나는 아내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도 몰랐고, 심지어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한 번은 아내에게 엽서를 보내면서 그녀의 이름 대신 처제의 이름을 적은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할 실수지만,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존재였다.

아내는 결혼 전에 결혼 상대를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큰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단다. 반면 나는, ‘하나님께서 내 사명을 감당할 사람을 붙여 주시겠지’라는 막연한 믿음만 있었을 뿐, 정작 기도는 하지 않았다.

결혼 후, 아내는 나의 작은 체구를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하나님 보시기에 큰 사람만 달라고 했더니…. 사람 보기에도 큰 사람을 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 말에 우리는 함께 웃었지만, 그 속에는 서로에 대한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담겨 있었다.

둘째, 우리는 자란 배경이 너무나 달랐다. 우리 형제들은 가방끈이 짧았다. 학업보다는 생계가 우선이었고, 배움보다 버팀이 더 중요했던 시절을 살아왔다. 반면 아내의 형제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을 다녀온 이들도 있었다. 

우리 집안의 어른들은 대부분 병으로 고생하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이 많았다.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가족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의 집안은 부모님은 물론 조부모님까지 모두 건강하셨고, 심지어 외조모님까지 함께 모시고 살 만큼 가족의 기반이 단단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우리는, 같은 상황을 마주해도 느끼는 감정과 반응이 달랐다.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 상대에게는 낯설었고, 익숙한 것이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큰형님은 6·25 동란 중에 돌아가셨으며, 남은 형님과 누님은 결핵과 속병으로 사경을 헤맸다. 가정 교육은 차치하고, 먹고살기에 바빴으며, 죽지 못해 살았다. 나는 어릴 때 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렸지만, 아내은 먹고살 만한 평범한 가정에서 윤리적, 정서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전하게 자랐다.

1981년 7월 31일 진해 수송학교에서 오전에 준장 학교장실에서 군목 제대 신고를 마치고 오후에 인근에 있는 진해 복민교회에서 고 지일규 목사 주례로 결혼을 했다. 그 해 12월에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에 위치한 소이감리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춘천 샘교회에 부임한 1985년 10월까지 약 4년간 목회하면서 내내 아내와 전쟁을 벌였다. 달콤한 신혼 대신 치열한 전투였다.  

첫 번째 전쟁은 청결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청결에 대한 감각이 나와 아내 전혀 달랐다. 나는 무뎠고 아내는 예민했다. 손을 닦는 것도 나는 하루에 한 번 세수할 때 닦으면 그만이었지만, 아내 외출할 때마다, 화장실 다녀올 때마다, 수시로 손을 닦았다. 본인만 닦으면 좋으련만, 나까지 닦기를 강요했다. 나는 반항했고, 그때마다 전쟁이 벌어졌다.

두 번째 갈등은 재정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사도들의 청빈한 삶을 기준 삼아, 주께서 허락하신 것만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오늘 먹을 것과 잘 곳, 입을 것만 있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아내는 보다 평범한 삶을 원했다. 내일을 위한 식량도 필요했고, 편안한 잠자리와 단정한 옷차림도 중요했다. 나는 당장의 생존에 필요한 것에만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그 외의 필요도 외면할 수 없다고 여겼다. 결국 나는 “배가 부르니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라며 아내를 몰아붙이고 말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돈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자란 시골 원천 웃마을에는 가게 하나 없었고, 무엇을 사려면 멀리 아랫마을까지 내려가야 했다. 그곳에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작은 가게 두 곳뿐이었다.기억을 더듬어 보면, 심부름으로 가게에 다녀온 일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습관은 어른이 된 후에도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나는 돈 쓰는 일을 꺼린다. 아니, 쓰는 법은 알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절약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때로는 호주머니에 돈이 있어도, 배가 고파도, 아무것도 사 먹지 못해 몸이 지치고 상할 때가 많았다. 가끔은 탈이 나기도 했다.

나는 뭔가를 고르거나 선택하는 일이 참 어렵다. ‘결정 장애’라는 말도 있는 것 같다.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르라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마음은 복잡해지고, 결국 아무것도 못 고른 채 멍하니 서 있게 된다. 커피를 주문할 때도, 넥타이를 고를 때도, 색깔을 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물건 사는 걸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됐다. 넥타이? 와이셔츠? 내 손으로 직접 사 본 적이 없다. 결혼 전에는 넥타이 하나 사면 1년은 기본으로 맸다. 두 개가 생기면 오히려 하나는 버렸다. 하나만 있어야 편했다. 와이셔츠도 마찬가지였다. 한 벌 사면 닳고 해질 때까지 입었다. 교인들이 선물해 준 와이셔츠는 늘 내 목에 비해 컸다. 목이 헐렁하니 어쩔 수 없이 가위로 뒤쪽을 살짝 잘라내고, 실로 꿰매 입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결혼 후 아내가 그 셔츠들을 모두 정리해버렸다. 

어느 날, 대학원 수업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려는데 임신 중이던 아내가 간곡히 부탁을 했다. “포도 한 송이만 사다 줘요.” 입덧으로 고생하던 시기였다. 나는 월요일에 올라가 며칠 만에 내려오면서, 그 부탁을 잊은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포도만 기다리던 아내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안겨줬는지,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 일 이후로, 나는 평생 아내에게 ‘포도 사건’으로 욕을 먹으며 살고 있다. 솔직히, 욕 먹어도 싸다.

또 어느 날엔, 교우 집에 들렀다가 사과 하나만 얻어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부탁도 결국 들어주지 못했다. 나는 누구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얻어오는 걸 몹시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 일로도 평생 욕을 먹는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저, 포도와 사과 앞에서 작아지는 남편일 뿐이다.

“배불러서 헛소리 한다”는 내 말에 아내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 말은 너무나도 무심했고, 아내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비싼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맛있는 걸 찾은 것도 아니었다. 사치스러운 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고가의 물건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삶의 작은 필요를 말했을 뿐인데, 나는 그걸 “배불러서 그런다”고 몰아붙였다. 아내는 억울해했고, 나는 그 억울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 사이의 작은 전쟁은 계속되었다. 말 한마디가, 마음을 다치게 하고, 그 마음이 또 말로 되받아쳐지며, 전쟁은 끝날 줄을 몰랐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을 쉽게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사람을 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 살아보고, 함께 부딪히고, 함께 웃고 울어봐야 비로소 그 사람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나 역시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오며 아내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 아니라는 걸 조금 늦게, 그러나 분명히 깨달았다. 그건 단지 삶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된 건, 살아온 시간 덕분이었다.

나는 일평생 빈혈과 입병을 달고 살았다. 알량한 지식에 소문까지 더해, 비타민 C며 철분제, 마이신, 항생제, 항히스타민제까지—입병과 빈혈에 좋다는 약은 죄다 사 먹었다. 하지만 그런 병들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입이 헐어 입천장, 목구멍, 혓바닥, 입 안쪽까지 수없이 뚫렸다.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고, 말도 하기 어려웠다. 원래 말주변이 없었는데, 내 입은 더욱 막혀버렸다. 고통은 꽤나 심했다.

게다가 틈만 나면 눈앞에 별이 보였고, 몸에서 미열이 떠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몸살을 앓았다. 그런데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병이 멈췄고 빈혈도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신고도 없이 사라졌다. 특별한 약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먹던 식단은 호화롭거나 사치스러운 게 아니라, 건강을 위한 평범하고 균형 잡힌 최소한의 식단이었다는 것을.… 아내의 요구는 배부르기 위한 것도, 사치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건강하고 건전한 삶을 위한 것이었다. 아이구 두야! 그걸 몰랐다니….

만약 내가 고집스럽게 예전 식단을 고수했더라면, 지금쯤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말은 잘 못하지만, 마음만은 늘 그렇게 전하고 있다.

세 번째 전쟁은 생활 습관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새로운 변화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익숙한 것을 고수하는 편이었다. 기계나 전자제품이 고장 나면, 새것을 사기보다는 어떻게든 고쳐 쓰려 했다. 이불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이 되면 다시 펴면 되는 걸, 왜 굳이 시간을 들여 반듯하게 개켜야 하느냐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게으름도 한몫했다. 아내는 그런 나의 습관에 답답함을 느꼈고, 나는 그런 아내의 부지런함에 피곤함을 느꼈다. 그렇게, 생활 속 작은 차이들이 조용한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새 살림을 시작하자마자, 아내와는 부엌 바닥 문제로 첫 번째 충돌이 있었다. 부엌 바닥엔 흙이 10센티미터쯤 쌓여 있었는데,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에 밟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내는 그 흙을 걷어내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임 목사님과 사모님도 그냥 쓰셨는데, 보기엔 좀 그래도 우리도 참고 살아야지…” 내겐 그게 ‘전통’이자 ‘인내’였다.

내가 움직이지 않자, 아내는 직접 해결책을 찾았다. 힘 좋고 성실한 주일학교 권○○ 선생에게 부탁한 것이다. 권 선생은 아무 말 없이,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부엌 바닥의 흙을 깨끗하게 치워주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부끄러웠고, 고마웠고, 무엇보다 아내의 결단력과 권 선생의 순수한 헌신에 조용히 감동했다.

우리 부부가 다투는 소리는 종종 사택 밖으로 새어나갔다. 교회 바로 앞에 살던 안○○ 권사 부부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자주 들었을 것이다. 조용한 밤, 문틈 사이로 새어 나가는 언성 높은 대화들그분들 귀에 닿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교회를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었고, 불평이나 뒷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분들은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셨다. 말없이, 조용히, 사랑으로.

시골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이 농사짓는 분들이다. 농삿일도 바쁘고 힘들텐데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았고 새벽기도 후에 이OO 장로와 안OO 권사는 눈이 오거나 하면 그 넓은 교회 마당을 깨끗이 쓸곤 집으로 갔다. 사모는 새벽기도 후에 또 잠만 자는 이 목사가 못마땅했다. 그들이 떠난 후에는 또 한바탕 했다.

신혼 초의 전쟁 같은 날들을 멈추게 한 건 우리의 믿음도, 신앙도 아니었다. 신조나 철학 같은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그 모든 갈등을 잠재운 건, 우리 딸 미리의 탄생이었다. 그날, 의사였던 차○○ 장로께서 사택 안방에서 미리를 받아 주셨다. 그런데 미리는 태어나자마자 숨을 쉬지 않았다. 순간, 공기가 멈춘 듯했다. 차 장로 재빨리 플라스틱 관을 미리의 코에 밀어 넣고 입으로 분비물을 빨아냈다. 그리고, 미리는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했다. 작고 연약한 생명이 처음으로 세상과 연결된 순간이었다. 그 울음소리는 우리 부부의 싸움을 멈추게 한가장 강력한 평화의 팡파레였다.

신혼 전쟁은 지금까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혼 전쟁이 끝나는 때를 나는 안다. ‘여든 살’이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세 살 때부터 시작된 내 못된 버릇 여든이 되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나….? 기대해 본다. 지나간 44년, 꼴통 신랑을 목회 잘 하도록 다독이고,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내 곁을 지켜준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녀는 내 인생 최고의 동역자이며 ,가장 인내심 깊은 목회 파트너였다.

중매 결혼에도 분명 장점이 있다. 특히, 신뢰하는 목사님이 중매를 해주셨다면 더 그렇다. 살다 보면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마찰이 일어나기도 하고, 오해가 쌓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 사이를 이어준 그 목사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분의 기도와 믿음이 우리 부부 사이의 신뢰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어준다. “지금은 이러이러 하더라도…앞으로는 잘 될 거야.” 그 믿음은 쉽게 저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중매해준 목사님이 우리 결혼의 보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신뢰가 우리 부부의 신뢰로 이어지고, 그분의 기도가 우리 가정의 기초가 되었다.

서로 다름이 신뢰로 회복되고 나면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물건을 고르고, 선택하고, 돈을 써야 할 때는아내 한다. 내가 못하는 것 아내가 하고 나는 편하다. 마음 놓고, 손 놓고, 쉴 수 있다. 외출할 때 복장도 아내 시키는 대로만 입으면 된다. 나는 편하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거울 앞에서 머뭇거릴 일도 없다. 신뢰가 쌓이면, 서로의 다름은 부담이 아니라 축복이 된다. 나는 정말, 편하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못해서 걱정이 많다. 추천하고 권고할 만한 해결책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처럼 하면 된다. 지금이라도 존경하고 신뢰하는 목사님을 찾아라. 그리고 중매를 맡겨라. 그리고 목사님 시키는 대로 하라. 그리하면 된다. 우리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 물론, 마찰도 있겠지만… 그건 당연한 거다. 살다 보면 부딪히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신뢰가 있으면 그 모든 걸 넘을 수 있다. 중매 목사님 단순한 연결자가 아니라 믿음의 보증인이다. 그 믿음 위에 세운 가정은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다.

소이교회는 참 좋은 교회였다. 교인들 역시 참 좋은 분들이었다. 목사 부부는 밤낮으로 신혼 전쟁을 치렀지만, 교인들은 그 모든 걸 조용히 눈 감아 주었다. 목사는 게으르고, 어설프고, 때로는 부족했지만—교인들은 묵묵히 견뎌 주었다. 그 인내와 사랑이 우리 부부를 지켜주었고, 그 덕분에 목회도 가정도 무너지지 않았다. 고맙기 그지없다. 그분들의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소이교회는 내게 은혜의 공동체였고, 참된 사랑을 배운 학교였다.

내가 소이교회에서 목회하던 시절은 농촌교회의 젊은 인력이 대도시로 빠져나가는 끝물이었다. 처음 부임했을 때, 주일학교 여선생 두 분이 찾아왔다. “목사님, 시집 가게 기도해 주세요.” 나는 기도해 드렸다. 그리고, 그분들은 정말 시집을 갔다. 젊은 선생들이 떠나고 나자 주일학교는 텅 비었다. 그때 나는 나이 드신 권사님들을 불러 주일학교 선생을 부탁드렸다. 권사님들은 아무 말 없이, 불평 없이, 기꺼이 순종하셨다. 그분들은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고, 찬송을 가르치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모습은 그 어떤 젊은 교사보다도 더 따뜻했고, 더 믿음직스러웠다. 소이교회는 그렇게 세대가 이어졌고, 믿음이 이어졌다.

나는 교인들에게 실망을 안겨 드린 적이 있다. 1985년, 연회 전에 서울의 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연회가 끝나면 서울로 간다고 교회에 광고까지 했다. 교인들은 모두 섭섭해 했다. 그 마음이 느껴졌다. 그런데, 서울 교회에서 갑자기 청빙을 취소했다. 난감했다. 이미 광고까지 했는데… 갈 곳도 없고, 교인들의 실망이 반발로 이어지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걱정이 됐다. 마침 어린이 주일이었다. 가까운 동산에서 야외 예배를 드렸다. 광고 시간, 나는 교인들 눈치를 살피며 머쓱하게 말했다. “서울로 가려던 것… 취소됐습니다.” 순간, 반발이 올 줄 알았던 그 자리에서 교인들은 환호성을 질러 주었다. “잘 됐어요, 목사님!”“계속 함께해요!” 그들은 나의 부족함을 덮어주었고, 나의 허물을 감싸주었다. 소이교회 교인들은그렇게 나를 다시 품어주었다. 그 사랑은 내 목회 인생의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지금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소이교회 교인들은 내가 대학원 공부를 할 때 그저 구경만 하지 않으셨다. 차○○ 장로 부부와 몇몇 권사님들은 장학금을 모아 조용히 내게 전해 주셨다. “목사를 키우는 것이 교회를 키우는 것이다.” 그분들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오늘의 나는 그분들이 키워주신 결과다. 그들의 사랑과 헌신이 내 목회의 뿌리가 되었다. 고마운 소이교회 교인들… 그분들의 후손들에게 주께서 복을 많이 내려주시길 빌며, 그리고 지금도그들을 돌보고 목회하는 후임 목사님들에게는 주의 크신 위로와 능력이 풍성히 더해지길 기도한다.

소이교회는 내게 단순한 사역지가 아니라 은혜의 품이었고, 믿음의 학교였으며, 사랑의 공동체였다.


Comments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